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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첫만남

hp-! 2026. 1. 30. 19:35


Fearless 지부장 K는 무거운 얼굴로 하프를 호출했다.

하프.
입사한 지 어느덧 1년을 넘긴 A급 가이드였다. 실력도, 평가도 안정권. 그럼에도 아직까지 확정된 페어는 없었다.

지부장 K는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 너머로 시선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프.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본부 내의 가이드와 센티넬 대부분은 이미 페어를 맺고 있었다.
남아 있는 이는—사실상 그녀뿐이었다.

지부장 K는 한참을 뜸 들인 끝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센티넬과 페어를 맺어줬으면 한다. 코드네임, 펄스.”

하프는 서류를 받아 들고 내용을 훑었다.
순간,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완벽에 가까운 기록. 결점 없는 외형.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교체된 가이드와 센티넬 이력.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부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지부장 K는 고개를 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왔군.”

그리고 조용히, 펄스가 들어왔다.

날카롭고도 나른한 인상.
군청색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 커다란 체구.
모두의 ‘이상형’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펄스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곧 제게 익숙해질 거예요. 금방.”

마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시선이 하프를 향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 하프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비릿한 미소와 압도적인 체격 때문일까.
하프는 이유 없이 위축된 채 말을 더듬었다. 마치 큰 짐승 앞에 선 토끼처럼.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센티넬 정보를 봤는데요. 펄스 요원의 가이드분들은 왜 다들 금방 그만두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지부장실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와 대비되듯, 펄스는 여유로웠다.

그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잠깐 호기심을 띠는 듯했으나, 곧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수면처럼 가라앉았다.

“아. 제 이전 페어들이요.”

펄스는 상체를 조금 숙여 하프와 시선을 맞췄다.
배려처럼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어딘가 계산적인 기색이 묻어 있었다.

“글쎄요. 왜였을까요? 제가 너무 잘해줘서 질렸을 수도 있죠.”

답답한 공기가 지부장실을 채웠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제가 좀 고집이 세서 그랬을지도.”

펄스는 하프의 반응을 읽듯 미소를 유지한 채 기다렸다.
상대가 흔들릴 때까지 재촉하지 않는 타입—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의 시선이 하프의 이어피스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하프 씨는 어때요? 저와 페어가 되는 게 벌써부터 궁금한가요? 아니면… 제가 좀 무서운가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만큼은 집요했다.

“어느 쪽이든, 저는 좋아요.”

하프는 부담에 눈길을 피하려다, 결국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고집이 세서… 그런 거겠네요.”

애써 무표정한 말투로 대답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한 시선으로 펄스를 바라봤다.

“무섭진 않아요. 오히려 궁금해요. 어떤 센티넬인지.”

‘고집’이라는 단어에 펄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예상했다는 듯, 혹은 즐겁다는 듯한 반응.

“궁금하다니, 아주 좋은 태도네요.”

그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덕분에 제가 어떤 센티넬인지… 직접 경험하게 될 테니까요.”

시선이 다시 이어피스를 스쳤다.

“그럼 알려드릴게요. 대신—”

그는 낮게 속삭이듯 물었다.

“하프 씨는요? 뭘 궁금해하고, 뭘 원하는지. 저한테 전부 말해줄 수 있나요?”

묘한 압박이 공기를 타고 스며들었다.
펄스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관찰했다.

“……제가 긴장하는 게 재밌으신가요?”

하프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말했다.

“물어보시면 다 말해드릴게요. 뭐든지요. 대신… 펄스 씨는 뭘 원하세요? 먼저 말해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흥미가 분명히 떠올랐다.

“혹시 그거, 긴장이 아니라 다른 감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펄스의 시선이 하프의 얼굴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반응을 탐색하는 맹수처럼.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진 않잖아요.”

하프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긴장한 거 맞아요… 아마도. 근데 계속, 그렇게 막 밀고 들어오시니까…”

솔직한 말에 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 꽤 솔직하시네요.”

그는 나른하게 웃었다.

“제가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뭐—아니요! 그건 아니고… 객관적으로는…”

하프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마주쳤다.

“저… 거짓말은 못 해요. 근데요, 계속 저한테만 묻고 답 안 해주시는 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요?”

펄스는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불공평이라.”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전 흥미로운 걸 좋아해요. 특히—이렇게 솔직하고, 저를 궁금해하는 사람.”

입가에 유희적인 미소가 번졌다.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너무 건조하잖아요. 저는… 좀 더 재미있는 쪽이 좋거든요.”

잠깐의 정적이 생기고, 하프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런가요. 제가 멋대로 판단해버렸네요.. 시정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고개를 기울이는 펄스의 시선을 마주하자, 다시 긴장이 목을 조였다.

“ 아, 제가 담당가이딩은 처음이라서요. 혹시 실수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하프의 사과에 펄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군청색 눈동자에 하프의 표정 변화가 선명하게 비쳤다.

“시정이 빠르네요.”

낮고 유연한 목소리였다. 담당가이딩이 처음이라는 말에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미숙함조차 계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실수요? 가이딩에 실수가 어딨겠어요. 중요한 건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느냐죠.”

펄스는 천천히 일어나 하프를 내려다봤다.

“알게 된다는 건 말 그대로예요. 지금은 제가 다 알려주지 않을 겁니다. 하프 씨가 직접 알아가야죠. 저랑.”

그는 정장을 흐트러짐 없이 여미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갈까요?”

하프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지부장 K를 힐끗 보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펄스를 따라 일어섰다.

복도로 나서자, 펄스가 자연스럽게 하프의 뒤로 다가왔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하지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간격이었다.

펄스는 복도를 걸으며  하프의 어깨에 손을 올릴듯 말듯 행동하다 낮게 웃었다.

"아직 제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괜찮아요. 제가 알려줄 테니까.”

하프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펄스 씨는… 정확히 제게 뭘 기대하시는 건가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어깨에 손, 올리셔도 괜찮아요.”

펄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천천히,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이 하프의 어깨에 닿았다.
도망칠 수 없을 만큼만 힘을 실어 감싸 쥐었다.

“이렇게 솔직해질 줄은 몰랐네요.”

그가 낮게 속삭였다.

“자꾸 그러면 내 기대치가 좀 높아질 수도 있어요. 내게서 도망치지마요.”

하프가 움찔했다.
“잠깐…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요? 그리고 도망치지 말라니—저는 안 도망쳐요. 그나저나 매번 가이드들에게 이러시는...!-”

그 말에 펄스는 짧게 웃었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말, 참 마음에 드네요.”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다른 가이드들에게도 그랬냐고요?”

하프의 질문에, 펄스의 미소가 아주 잠깐 달라졌다.

“아뇨.”
단호했다.
“하프 씨가 처음이에요.”

그 말에 하프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하프는 '분명 오늘 처음 본 사이일텐데 왜이리 편안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입을 열렸다.

“이상한 사람...”

그 순간, 펄스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와 하프의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응, 하프씨가 그러면 나는 이상한 사람 할께요.
그럼 오늘은 제 사무실로 가죠.”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앞으로 가장 자주 오게 될 곳이니까.”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펄스는 문고리에 손을 얹고 하프를 돌아봤다.

“여기예요.”
낮고 느린 목소리.
“이제는, 우리 공간이 될 곳.”

문이 닫히며 복도의 소음이 차단됐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분명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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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옴님